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 (문단 편집) === 젊은 시절 === [[1924년]] [[민족주의자]] 야신 알 알하셰미 총리에 의해 [[이라크 왕국]]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에 내무부 장관까지 역임하였다. 가일라니와 야신 알 알하셰미 총리는 두 가지 이념을 공유했는데 이는 [[민족주의]]와 [[혐성국|반영국주의]]였다. 그들은 [[누리 알 사이드]] 총리가 서명한 영국-이라크 통행권 조약(1930년)을 '''파기했고'''. 이에 힘입어, 야신 알 알하셰미과 함께 민족 형제당[* (حزب الاخاء الوطني)]을 창당했다. 그리고 마침내 [[1933년]] 가일라니는 총리가 되지만 당시 혼란스러웠던 [[이라크 왕국]]의 내부적인 문제와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, 겨우 8개월밖에 총리직을 수행하지 못했다. 이후 [[1940년]] [[3월 31일]] 그는 다시 총리가 되었고, [[제2차 세계 대전]]은 이미 시작된 뒤였다. 또한 이라크 왕국은 국왕 [[가지 1세]]의 죽음을 겪었다.[* 원래 [[가지 1세]]의 아들 [[파이살 2세]]에게 왕위가 계승 되어야 했지만 '''당시 [[파이살 2세]]는 겨우 4살이였다.''' 이러한 이유로 하심 가문은 섭정으로 가지 1세의 삼촌 [[압둘-일라]]를 세웠다.] [[압둘-일라]] 섭정은 [[영국]]을 지지했지만, 가일라니의 이미 커질대로 커진 권력은 막을수 없었는데, 섭정은 [[연합국]] 병력이 이라크를 통과할수 있도록 [[군사통행권]]을 허가했지만, 민족주의자 총리 가일라니는 이것을 거부했고, 심지어는 추축국인 [[이탈리아 왕국]]과 갑자기 단교까지 하는 이해할수 없는 외교 정책등등으로 이 정책을 시작으로 가일라니의 폭정이 시작됐다. 그후, 전 [[이라크 왕국]] 총리이자 당시 법무부 장관인 [[나지 샤우캇]]을 [[터키]]로 보내 당시 주 터키 독일 대사로 있던 [[프란츠 폰 파펜]]과 만나, 독일의 지지를 얻었고, 지지를 받는 대가로, 이라크는 [[아프베어]]의 중동 기지가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